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이유와 최초 선동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사건


1.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사건

2023년 8월 25일 육군사관학교가 교내 충무관 앞에 있는 독립군 및 광복군 영웅 흉상을 철거해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는 절차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불거진 논란.

사흘 뒤인 8월 28일에는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공동 청사에 설치된 홍범도의 흉상도 덩달아 철거하겠다고 밝혔으며 8월 30일, 박승환 참령의 동상 역시 철거 및 이전 대상인 것으로 밝혀졌다.



2. 최초 문제 제기자

이 모든 논란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은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이자 3성장군 출신인 국민의힘 소속 신원식 의원이다. 

신원식 의원이 2022년 정기국회 국정감사 중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고 하나, 자유시 참변에서 독립군의 씨가 마르는 데 주역이었다. 소위 소련군이 된 이 분을 굳이 흉상을 세우고 육사에 만들라고 했는지 의문이다."라고 발언 및 지적하였고, 2022년 11월에 국회지적사항이라는 명분으로 육사가 흉상의 이전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원식 의원은 9월 5일 현재 차기 국방부장관 유력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다.



3. 철거 대상

국방부가 철거 대상으로 지목한 독립운동가들과 그들의 간단한 약력은 다음과 같다. 순서는 주 활동 시기별로 구분되어 있다.



운파(雲坡) 박승환

대한제국 육군 참령. 조선군 시절 무과에 급제하여 군 복무를 시작하였다. 이후 대한제국군 시위대 제1연대 1대대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책임을 통감하며 자결했다. 상관의 죽음을 보고 격노한 휘하 시위대원들은 대한제국군 최후의 항전인 남대문 전투를 일으켰으며, 그들 중 다수는 다시 정미의병과 이후의 무장독립투쟁에 가담했다. 따라서 이들은 구 한국군과 독립군, 나아가 현대 한국군의 군사적 정통성을 잇는 가교가 된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우당(友堂) 이회영

대부호 양반가 출신으로, 을사조약 이후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 결성에 참여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형제들과 함께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가 양성에 나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내분으로 인해 곧 물러났고, 1930년대에는 항일구국동맹의 의장으로서 일본 인사들에 대한 사보타주를 기획했다. 이후 만주로 잠입하다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당한 뒤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여천(汝千) 홍범도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포수 출신으로 정식 군사교육은 받은 바 없으나 1895년 을미의병 시기부터 20년 넘게 항일 전쟁에 가담하였으며, 경술국치 이후인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에는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봉오동 전투의 주역이다.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이 약화되자 민족자결주의를 외치는 소련으로 이동하였다.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한 소련 국가폭력의 피해자 중 하나로, 1930년대 소수민족 박해 당시 여타 고려인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당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2021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백야(白冶) 김좌진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양반가 출신이며,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에서 복무했다. 군대해산 이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이동하였으며 1910년대에는 무장투쟁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북로군정서를 설립하고 청산리 전투를 이끌었으며, 1920년대 중반에는 신민부의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직을 수행했다. 1930년 고려공산당 출신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백산(白山) 지청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 경력을 시작했다. 경술국치 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편입되었으나, 임관 직후 바로 탈영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하였고, 서로군정서와 한국독립군을 조직했다. 일본의 만주 진출로 무장투쟁이 위축된 1930년대에도 대전자령 전투와 쌍성보 전투 등을 이끌었으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이 결성되자 그 총사령관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철기(鐵驥, 哲琦) 이범석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및 국방부장관. 신규식 선생의 주선으로 중국 전계군벌의 윈난 육군강무학교에서 수학했다. 역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했으며 북로군정서에 가담하여 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를 치렀다. 이후 중국 국민혁명군으로 군적을 옮겨 항일 활동에 참여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에 가담하여 부참모장과 제2지대장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광복 후에는 초대 국무총리이자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946-1950년 한국군의 숙군 당시에는 군내 좌익 계열에 대해 집단 처형을 지시하는 등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4. 국방부가 밝힌 철거 사유

육사의 입장문과 이종섭 국방부장관의 발언에서 도출되는 철거 사유는 다음과 같다.

흉상의 인물 중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던 사람이 있다.

육사는 공산 세력과 맞서 싸울 간부를 양성하는 곳이기 때문에, 공산주의 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의 흉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독립운동보다는 창군 이후 군사적 분야에 적합한 인물의 흉상을 비치하는 것이 적절하다.

현재는 국난극복의 역사가 특정 시기에 국한되는 문제가 있다.

흉상 위치의 적절성 논란이 있다.



5. 국방부의 이중잣대 논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지난 1962년 홍범도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한 당사자다. 게다가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에서 군사총책으로 활동하며 사형 선고까지 받은 이력이 있다. 그리고 육군사관학교 경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내 생명 조국을 위해"라는 휘호가 있는 호국비와 마찬가지로 박 전 대통령이 남긴 "호국간성(護國干成)의 도장(道場)"이라는 휘호가 있다.

이처럼 박정희는 현재 강행되는 독립운동가 흉상 철거의 부당함을 입증하는 강력한 반증 사례인 것이다. 지금 정부가 내세우는 기준대로면, 육사에 세워진 박정희 관련 기념물들도 철거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지적들에 대해 국방부는 박정희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분'이라며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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